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은 1962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 축구를 하기 위해 춘천으로 이사했다.
춘천고를 졸업한 뒤 명지대학교에 입학해 각종 대회를 휩쓸며 당시 명문 축구클럽이었던 명지대학교를 대학 상위권에 올려놓았다.
명지대를 졸업하고 상무군에 입대해 2년간 복무한 손웅정은 1986년 말 현대 타이거즈로부터 제의를 받아 현대에 입단했다.
그해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하며 5골을 터뜨린 손웅정은 1986년 브라질 투어에서도 한국 U-23 축구대표팀 소속으로 활약했으나 이듬해인 1988년 부상을 당했다.
명지대를 졸업하고 상무군에 입대해 2년간 복무한 손웅정은 1986년 말 현대 타이거즈로부터 제의를 받아 현대에 입단했다.
그해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하며 5골을 터뜨린 손웅정은 1986년 브라질 투어에서도 한국 U-23 축구대표팀 소속으로 활약했으나 이듬해인 1988년 부상을 당했다.
그는 1988년 U-23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었으나 올림픽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손웅정을 U-23 대표팀에 발탁한 일화 박종환 감독의 요청으로 일화 천마에 입단해 2년간 조커로 활약했다.
부상으로 인해 28세라는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K리그 통산 기록은 37경기 7득점이다.
춘천 공지천에서 춘천유소년FC 감독을 역임하며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했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SON Soccer’라 이름을 지었다.
‘아카데미’를 설립해 코치로서 유소년 축구선수들을 직접 육성하고 지도하고 있다.
부상으로 선수를 은퇴한 후, 20년 선수 생활 동안 느끼고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두 아들이 축구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 축구선수 엘리트 코스가 아닌 기초부터 직접 훈련시켰다.
초등학교 축구팀에 보내는 대신 직접 훈련을 시키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가끔 3~4시간씩 리프팅을 시켜 오랫동안 기초만 익히게 했다.
그는 몸이 탄탄했던 17~18세쯤 본격적인 사격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하는 등 기존 방식과는 다른 훈련 방식으로 아들을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로 키웠다.
손흥민의 아버지는 “축구를 워낙 좋아했지만 전력을 다해 뛰고 실력이 부족한 삼류선수였다”며 “나처럼 축구를 못한다고 생각해서 정반대로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나.” 그는 “아주 오랫동안 기초훈련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했다.
축구에서는 모든 것이 기본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게임에서 공을 자유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패스, 드리블, 헤딩, 슛 등을 정확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어려서 배운 동작이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반사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이미 늦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손흥민은 기본을 배우는 데 7년이 걸렸다고 밝혔다.
두 아들 손흥윤, 손흥민은 모두 축구선수의 길을 걸었지만 큰 아들 손흥윤은 부상으로 일찍 축구를 그만뒀다.
손흥민은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손씨는 “본능적으로 오른발이 먼저 나오기보다는 가장 필요한 발이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해야 했다”고 말했다.
흥민에게 ‘왼발을 잊지 말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흥민은 본격적으로 슈팅 훈련을 할 때도 매일 왼발로 시작했다.
산만하지 않고 체력이 좋을 때는 왼발 먼저 슛 훈련을 하고, 끝나면 오른발 슛 훈련을 했다.
덕분에 이제 흥민은 왼발 슈팅이 더 편해졌다고 할 정도다.
” 내 아들 손흥민은 결코 세계적인 선수가 아니다.
축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며, 흥민의 골은 흥민과 동료 선수들의 피와 땀에서 나온다.
살얼음판을 걷거나 돌다리를 건너듯이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선수 은퇴를 1년 1년 미루면서 젊을 때부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한다.
흥민의 연애와 결혼도 선수 은퇴 이후로 미루기로 결정됐다.
고향인 춘천에 아들 손흥민의 이름을 딴 ‘손흥민 체육공원’을 건립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춘천시나 다른 지자체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오로지 손흥민의 개인 자금으로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축구장, 족구장, 풋살장도 있습니다.
또한 손웅정은 청소년 양성을 위해 축구 아카데미를 운영할 예정이며, 일부는 일반인에게도 무료로 공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