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조선백자유적이라 불리는 광주 번천리 가마터(사적 제314호)

광주 번천리 조선백자사적 제314호(1985년 11월 7일 지정) 이건희 컬렉션에서 천지의 상태가 적혀 있는 그릇으로 국립공원에 기증되었습니다.

맑고 투명한 색감은 조선백자 중 거의 최고 수준이다.

바로 이 번천리 가마에서 나온 것이지요. 16~17세기.

https://m.blog.naver.com/chatelain/222438417094

백자 천지현황각그릇(국보 제286호)@이건희 컬렉션_ 국박천지현황각백자사발(白磁鉢(白磁 ‘천”地) ‘ ‘玄’ ‘黃&#…m) .blog.naver.com

1466년부터 관청이 창설된 1468년부터 이전이 중단되고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에 자리잡은 1752년까지의 기간은 약 280년이다.

여기서 기록과 발굴을 통해 확인된 바와 같이 가마의 이전주기는 약 10년이므로 관가마는 총 28회 정도 이전 설치되었다.

가마 수를 이전 횟수로 나누면 10년마다 해당 지역에 설치된 가마 수를 계산합니다.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숫자는 전체적인 현상을 살펴보기 위해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평균치로 가정하고 있으며, 10년마다 대략 8개의 가마가 설치되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발굴된 가마터는 가마벽면과 구조물, 퇴적물에서 출토된 파편의 양과 특성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수년 이상 사용된 가마터임이 확인되어 가마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매년 순차적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정한 수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광주 번천리 5가마터 – 16세기 조선시대 왕실백자공장 마루형 등불, 1554년경, 현재 길이 23m, 폭 1.7~2.2m. 경사가 완만한 등불이며, 가마 끝 부분의 손상으로 인해 정확한 전체 길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다.

인근에 공방터가 발굴되었고, 1554년 제작된 백자 묘석도 출토되어 조선전기 도자기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291

광주조선백자유적(廣州 朝鮮白磁 窯址) 한국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피에르 위그(Pierre Hugues)의 설치 작품.

■ 조선백자 연대기의 절대적 기준연도를 제공하는 묘비(1554년) 출토

경기도 광주시 번천리 백자유적 백자 음각 묘비(1554년), 이화여대박물관. 한국민속문화백과사전 사진

발굴현장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광주지사 1467-1883

관아(광주출장소)가 사라졌다고 해서 번천리 일대에서 가마와 도예가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70년대 후반까지 번천리 5호 가마가 있던 마을에는 가마가 가득해 실시간으로 도자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공의 삶은 ‘비참’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도예가의 삶이 감금과 수탈로 가혹했다는 사실은 일본으로 끌려간 뒤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전문 도예가들의 ‘현상’을 통해 확인된다.

그 결과 탐험시대에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은이 도자기 무역을 통해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조선은 영조대까지 불꽃을 이어갔지만, 계급적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한 조선 이왕실과 유교 무당들의 협력 덕분에 500년 동안 독점을 유지한 뒤 한순간에 무너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조는 나라를 일본 황실에 넘겨준 대가로 연금을 받았고, 이조의 유교 무당 엘리트인 노론 관료들은 식민 행정의 손과 발에 수평적으로 이양됐다.

, 그들의 기본 지위를 왕실 의식을 수행하는 무당에서 일본 황실에 봉사하는 무당으로 변경했습니다.

수평으로 ‘귀족’으로 이동했습니다.

식민지 지배와 6·25전쟁으로 한반도의 기존 질서인 카스트 제도와 유교가 무너진 대한민국에서도 도공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미 가정용 도자기와 의례용 그릇으로서의 시장 수요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쯤에는 일본 특수부대에 의해 수요가 잠시 증가하는 듯했으나 곧 가라앉았다.

70년대 말 분원리에 기름가마가 등장하고 이어서 가스가마가 등장하면서 가마의 위치가 무의미해졌다.

한국에서는 산업혁명이 끝나고 대규모 자본축적이 시작된 1990년대 이후부터 생활용이나 오브제용 고급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조금씩이나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특히 일부 부유층을 중심으로 결혼용품으로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있었지만 이는 일본 수입품이나 유럽산 소 뼈로 만든 본차이나의 특산품일 뿐 국내 도자기 산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착취를 통해 지배층의 손에 넘어간 백자가 마치 유교 무당의 ‘고귀한’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재배치되어 20세기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것을 블랙코미디라고 한다.

세기. 이 슬픈 그릇의 물질적 형태는 토기장이의 착취를 통해 만들어졌고, 완전히 도려내어 버려졌습니다.

현대 공화국의 시민들은 자랑스럽고 현명한 조상들의 슬로건에 맞지 않는 당대의 불편한 비극을 무시합니다.

조선백자가 우수했다면 그것은 그 생산을 제한하고 희소성의 법칙을 강요했던 조선 지배층 때문이 아니었다.

이처럼 가혹한 조건 속에서도 이렇게 뛰어난 백자를 만들어낸 조선 도공들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문득 학자라고 자처하면서 백자를 찬양하는 것은 조병갑 고부군수와 친일관료 민영휘 덕분에 한국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 광주시 전역에 분포된 321개 가마 분포도

작업장 내 온돌시설

□ 초기 청화백자가 끝나고 철백자가 등장함. 임진왜란, 호란전쟁 등 전쟁의 여파로 인해 기존 청화백자에 수입안료(코발트) 공급이 어려워 청화백자의 생산이 거의 전무하게 되었다.

광주지점 도예가들은 국내에서 쉽게 공급할 수 있는 산화철안료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 전후 사회환경의 영향, 강렬한 붓터치, 유머러스한 문양, 자유분방한 표현의 등장

□ 번천리 5호 가마 외부복원

◦ 발굴과정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번천리 5호 가마는 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 예정지였다.

토기 대량 회수 등의 이유로 지표조사 중 한국도로공사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인양 발굴을 의뢰해 이화여인 발굴 조사가 시작됐다.

나선화 선임연구원(전 문화재청장)의 주도로 대학박물관에서 진행됐다.

첫 번째 현장방문은 1985년 12월에 이루어졌다.

당시 텃밭이었던 이 일대의 주요 발굴조사는 지형도 작성과 도랑(2×10m) 파기, 유적의 대략적인 성질 등을 파악한 뒤, 이듬해 1986년 4월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는 가마와 작업장 부지를 확인한 후 최종 실측작업을 거쳐 유물의 수집과 분류를 거쳐 1986년 5월 발굴이 완료됐다.

발굴 결과 번천리 5호 가마는 조선 전기 광주분의 주요 가마로 밝혀졌다.

폐허 상부에 위치할 예정이었던 중부고속도로 광주IC는 설계변경을 통해 보존되었으며,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사적 제31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발굴 결과, 번천리 사적 제3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지리에는 물품 보관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번천리 5호 가마터에도 한 곳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마와 2개의 작업장. 1차 공방에는 화로와 화덕, 상부 시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고, 방어 흔적도 남아 있다.

두 번째 작업장에는 여전히 용광로와 굴뚝 시설이 있습니다.

번천리 5호 가마의 길이는 약 23m로 추정되나 발굴조사를 통해 길이 17m, 폭 1.7~2.2m로 확인되었으며 ‘단실 불기둥 가마’였다.

10인치 경사면에 건설되었습니다.

화로는 위쪽과 아래쪽 두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두 개의 용광로의 모양은 비슷하다.

화로는 타원형으로 길이 3.4~1.8m, 입구는 진흙과 돌로 만들었고, 폭은 약 50~60cm이다.

분청사기(15~16세기)

갑발편, 한글 비문(16세기)

번천리 5호 가마 백자(16세기)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백자철화운룡문항아리(17세기)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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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화용문항아리, 조선 17세기 높이 45.8cm 보물 제645호(1978년 12월 7일 지정) 이대박물관 소장 철화백자 용준이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17세기 전반쯤부터 기록과 유물연구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반복된 전쟁으로 인해 재료력의 부족과 청화안료의 부족으로 청화백자를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다양한 방안을 모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완성된 백자에 청화백자와 비슷하게 임시 드로잉을 그리는 ‘패션 페인팅’을 활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면서 ‘석간주’를 이용하여 문양을 그린 철화백자 용준이 제작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17세기 초중반에 조업한 것으로 추정되는 관청유적에서 확인된 철화백자 용문호본과 용준의 간지명문, 철화백자와 출토품의 특징을 통해 입증된다.

유물. 1985년 이화여대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한 결과, 이 백자 철화운룡문항아리는 공식 유적지 중 하나인 경기도 광주 선동리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17세기 중반. 회백색 유약과 특이한 형태, 운룡문, 당초문, 삼각선 등의 철사문양과 오목한 굽의 표현이 17세기 상림리, 선동리, 정지리를 연상시킨다.

경기도 광주군에 위치한 정부청사. 가마터의 백자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변형은 1489년(성종 20)에 제작된 백자 청화송죽문항아리(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와 백자 청화송죽문항아리에서 발견되었다.

16세기 후반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죽문항아리(이화여대박물관) 이 단지에는 17세기 전반의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항아리 표면에 장식된 운룡 문양으로 보아 이 항아리는 당시 궁궐에서 사용하던 용준항(용준항) 중 하나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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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 ‘홍치2년’ 송대명항아리(성종 20년, 조선 1489년) 높이 48.7㎝, 아구지름 13.1㎝, 밑지름 17.8㎝ 국보 제176호( 1974.07.09)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품 국가유산청 사진

작은 입과 풍만한 어깨 라인은 고려시대 매병(梅甁)을 연상시킨다.

허리는 어깨부터 점차 좁아지며, 발뒤꿈치로 갈수록 급격하게 벌어집니다.

이러한 유형의 예로는 백자 청화송죽장병(보물), 순백자항아리 등이 있다.

이 항아리는 오랫동안 지리산 화엄사에 전승되던 유물인데, 두 차례 도난당한 뒤 발견되어 동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주둥이 안쪽에 ‘홍기’라고 새겨져 있어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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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16세기) 높이 47cm, 아가리 지름 15.4cm, 밑지름 16.7cm 보물 제644호(1978년 12월 7일 지정)

그릇 몸체 전면에는 소나무 한 그루와 대나무 여러 그루가 그려져 있다.

소나무 아래에는 책상 위에 팔을 얹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대나무 아래에는 선비가 거문고를 들고 소년과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물의 구도와 배치, 묘사가 16세기 후반의 화풍과 매우 유사하여 이 항아리의 제작 연대는 대체로 1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 갑번 : 내화점토로 만든 갑발 안에 그릇을 넣어 굽는 방법이다.

불이 직접 닿지 않고 불순물을 끌어들이지 않기 때문에 주로 왕실에 바칠 고급 물품을 굽는 데 사용됐다.

가마를 겹겹이 쌓아 가마 내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 예번(例燔) 가장 기본적인 굽는 방법은 가마 바닥에 도지미를 놓고 그 위에 그릇을 하나씩 올려놓는 것이다.

공간 활용도가 낮아 한 번에 많은 양을 소성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점을 겹쳐서 굽는 상번에 비하면 고품질의 백자를 얻을 수 있다.

□ 상번은 도지미 위에 접시 여러 개를 쌓아 굽는 방식이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접시를 구울 수 있어 효율적이지만, 쌓인 그릇 사이에 내화모래와 점토 주형 트레이를 넣어 받쳐줘야 그릇 안쪽에 흔적이 남는 단점이 있다.

서로 달라붙기 때문에 일반용으로 품질이 낮은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갑발을 하나씩 넣어 정성껏 굽는 갑번(匣燔), 갑발을 쓰지 않고 하나씩 구워내는 예번(例燔), 여러 조각을 얹어 굽는 상번(常燔)이 있다.

대규모 생산이 가능한 방식으로 서로 겹쳐 쌓이게 됩니다.

백자철화원숭이무늬항아리(1962), 백자도화, 17세기말~18세기초, 조선, 높이 30.8cm 국보 제93호(1962.12.20) 국립공원 소장본본관 2029호

□ 왜 철과 백자가 있는가? 17세기 조선은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좌절하기보다는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그릇에도 반영되었다.

17세기에 제작된 그릇은 일반적으로 원료를 정제하는 데 문제가 많아 백자가 회백색으로 변하는 등 열악한 생산 환경을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조선 초기에 큰 사랑을 받았던 청화백자의 제작이 어려워졌고, 왕실의 의례에 필요한 각종 기구조차 제작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 수준이 높았다.

인조 16년(1638) 왕실의례 때 주요 의례용구로 사용된 청화백자 화용준(畫龍樽)이 부족하여 제작이 쉽지 않아 가와용준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假畫龍樽)이 대신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의 상처에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아 청백안료 확보도 쉽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와 후금나라 사이에 긴장된 관계가 있어서 전량 중국에서 수입한 청화안료를 사용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왕실용 도자기를 생산하는 관청의 경영도 어려웠다.

운영비를 줄이기 위해 제작을 중단하고 장인의 수가 줄어들면서 좋은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도자기 생산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청산안료 대신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철안료를 선호하게 됐다.

청화백자가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상징한다면, 철화백자는 단순하고 검소한 외관으로 시대적 미감을 반영합니다.

_국박의 설명

조선시대 16~19세기 광주 주변 가마에서 출토된 갑발과 도침

백자 청화매조대문병 조선시대 15~16세기

조선시대 신대리 가마에서 출토된 백자, 16~17세기

번천리 5호 가마 출토 백자석(조선, 16세기)

□ 분원리 가마에서 출토된 백자 접시

분원리 가마에서 출토된 백자그릇(조선, 18~19세기)

현재까지 발굴된 조선 전기 가마의 구조는 두 종류의 가마 사이에 특별한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번천리에는 1550년대 같은 시기에 운영되었던 9호 가마와 5호 가마가 있다.

번천리 9호에서는 왕실에서 사용하던 백자 ‘천지현황(天地玄黃)’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파편과 갑발이 발견됐고, 번천리 5호에서는 약 200m 정도다.

멀리서 비문이나 개발은 출토되지 않았지만 그릇을 서로 쌓아 굽는 방법이 발견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품질이 낮은 백자가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두 가마는 관가마의 설치와 운영방식, 특성을 대표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결국 관요의 경우 왕실용 최고 품질의 백자를 생산하는 곳이 1~2곳, 관아용 그릇을 대량으로 만드는 곳이 6~7곳이 특정 시간에 동시에 작업하게 됐다.

광주의 가마는 공간 구성과 규모는 다르지만 모두 만들어진다.

완만한 ​​경사면에 터널 형태로 지어진 등불이다.

물론, 일부 가마만 발굴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전혀 다른 구조가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1493년 사옹원 생산자 유자광이 광주의 백자 가마는 와부(臥釜)라고 왕에게 조언했으나, 제작 과정에서 그릇이 변형되거나 부정확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장률이 낮은 중국산 도자기 가마(立釜)로 교체해야 합니다.

. 그러나 발굴 결과 16세기 중반과 15세기에 조업된 번천리 9호 가마와 5호 가마는 모두 와부, 즉 등교인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식 출입구를 건설하려는 계획은 기술이나 건축 자재의 문제인지, 와부의 단점을 개선할 수 있었는지 등으로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